KBO리그 역사
KBO 리그(한국프로야구)는 1982년에 시작된 한국의 프로야구 리그입니다. 처음에는 6개 팀으로 시작했으며, 현재는 10개 팀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KBO 리그는 매년 4월에 정규 시즌이 시작되어 10월까지 진행되며, 이후 포스트시즌이 이어집니다.
KBO 리그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야구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리그의 발전과 함께 많은 유명 선수들이 배출되었고, 해외 리그로 진출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리그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팀의 열띤 팬 문화와 응원 방식입니다. 특히, 팀별로 고유한 응원가와 응원 도구가 있어 경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KBO 리그는 한국 스포츠의 중요한 부분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2020년대에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교야구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준준결승부터 이미 매진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 대표적인 스타로 1971년 경북고등학교의 남우식, 1972년 역전의 명수 군산상일고등학교의 김봉연, 1976년 경남고등학교의 최동원, 1978년 부산고등학교의 양상문, 선린상업고등학교의 박노준 등 매년 대스타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197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까지 총 4개 토너먼트 대회에 입장한 관객은 112만 명에 달했다.
고교야구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출범 후에도 한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줄이면서 그 인기를 일부러 눌러버릴 정도였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처럼 리그 출범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것을 야구계에서도 동의한다고 한다. 프로축구가 2프로팀과 3실업팀으로 리그를 급조하고, 정상적인 연고 밀착 운영을 하지 못했던 잘못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상적인 고교야구의 인기를 억지로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했다는 과오가 있는 것이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지 컬럼도 프로야구의 출범 시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했다.
고교야구의 인기와는 별개로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면서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당시 대한야구협회김종락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경제 개발에 올인하면서 국민들을 옥죄던 유신 정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이때 홍윤희를 중심으로 논의했던 계획안은 수 년 뒤 고스란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독재 정권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 정서와 여가 선용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3S 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경남고등학교 출신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학봉민정수석비서관은 그 전에도 사석에서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이 전했다.
하지만 여가 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얘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건 틀어막았지만 대학교에서 한창 최루탄을 맞고 화염병을 던져봤던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논란을 다 논외로 한다고 쳐도 그 당시에 가족 단위로 즐길 만한 여가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는 이미 프로화를 위한 기반을 민간 차원에서 갖춰놓았으므로,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에서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자 MBC의 역할과 의지 및 국민들의 호응이 겹쳐 성공적으로 프로리그가 열렸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 축구계에서도 프로화를 추진하였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 조명 설치 등을 이유로 139억 원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렸다. 반면 대한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주도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 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있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우선 프로야구부터 출범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정부의 지원이 없는 방법은 대기업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KBO 리그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을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현재까지도 타 스포츠 리그에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운영 자금 지원을 통해 연명하는 리그 또한 존재한다. 당시에 창설된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손오공티비
Christie Hearn – https://sites.google.com/view/loss5566